게시날자 : 2022-06-15

주체111(2022)년 6월 15일 《소개》

 

애국녀성 백선행

 

백선행과 백선행기념관

평양의 련광정앞에는 옛 모습그대로 남아있는 하나의 석조건물이 있다. 그것은 백선행이라는 한 녀인의 민족을 위한 덕행을 전하는 유적이다.

백선행은 1848년 11월 19일 평양부 박구리(오늘의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에서 수원사람인 백지용의 맏딸로 태여나 어려운 가정형편과 모진 인생고초를 겪으며 성장하였다.

그는 7살에 아버지를 잃고 1862년 평양사람 안재황에게 시집을 갔으나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그가 사망하여 16살의 청춘과부가 되였다. 이때부터 그는 백과부로 불리우게 되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본가집살이를 한 그에게는 친정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집 한채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이악한 노력으로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앞뒤마당에는 봉선화를 심어 씨를 받아 장에 내다 팔았으며 질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돌면서 뜨물찌끼를 거두어다 돼지를 기르는 등 남들이 저어하는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누에벌레치기도 하고 물레와 베틀을 마련하여 밤이면 무명과 베, 명주를 짰다. 이렇게 그는 곁눈 한번 팔새없이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는 20대 한창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옷이나 치장에는 관심이 없이 수수하게 생활하였으며 나들이나 명절놀이에도 가본적이 없었다. 그라고 왜 녀성으로서 아름다움을 가꾸고 즐거운 생활을 누릴 생각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모든것을 마다하고 한푼두푼 돈을 모아 수십년만에는 얼마간의 뭉치돈을 저축할수 있었지만 향락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백선행은 평양일대 부호로 소문이 났지만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여전히 근검절약의 생활을 하였다. 한번은 집에 온 손님에게 랭면을 대접하였는데 그가 음식을 남기는것을 보고는 아깝지 않는가고 핀잔을 주었으며 그것을 자신이 먹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있다.

백선행이 사람들속에서 명망이 높았던것은 그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민족을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하였기때문이다.

무릇 자산은 모으기도 힘들거니와 쓰기도 힘들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산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수전노로 되여 비난과 저주를 받기도 하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되기도 하기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백선행은 자산을 쓸줄 아는 녀성이라고 할수 있다.

백선행이 처음으로 자선사업을 한것은 대동군 송산리(오늘의 만경대구역)에 있는 《솔뫼다리》를 새로 부설한것이다. 그는 큰물이 나면 허술한 나무다리로 사람들이 오가는데 불편해하는것을 보고 3천원의 자금을 투자하여 돌다리를 건설하였다. 당시 3천원이라고 하면 떠들썩한 잔치 100번을 차릴수 있는 거액이였다고 한다. 1914 년에 이 다리가 준공되자 사람들은 그의 소행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백선행》이라고 부르고 그 다리를 《백선교》라고 하였다.

그가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한 기여는 백선행기념관에도 어려있다.

당시 평양의 신시가지에는 부립공회당이 하나 있었다. 그 공회당의 사용권이 일본인들에게만 있고 조선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선행은 분개한 나머지 유지들과 함께 조선사람들을 위한 공회당건설을 발기한데 이어 건설이 시작되자 총공사부담을 혼자서 걸머지고 수만원에 달하는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였다. 그리하여 련광정앞에 3층짜리 석조건물인 평양공회당(오늘의 백선행기념관)이 세워지게 되였다.

백선행은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막대한 투자를 하였는데 평양의 광성보통학교, 창덕학교, 숭의녀학교와 같은 학교들에서는 그가 기증한 수십정보의 토지와 거액의 돈을 밑천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백선행은 자기의 후원을 받고있는 학교들에 나가서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군 하였다.

너희들은 조선의 장래를 책임지게 될 아들딸들이다. 졸린다고 자지 말고 놀고싶다고 놀지 말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을 밀어두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한다. 너희들이 공부를 잘해야 우리 나라가 독립된단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께서도 백선행의 덕이 미친 창덕학교에서 그 덕행의 일부를 받아안은 셈이라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이렇듯 백선행은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였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기에 자기가 평생을 두고 모은 거액의 돈을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아낌없이 희사할수 있었다. 하기에 그는 자선사업으로 표창을 하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총독부고관이 평양에 와서 면회를 청하였을 때에도 단호히 거절하였던것이다.

백선행은 1933년 5월 8일 85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에서 녀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장이 진행되였는데 그의 장례행렬로는 남녀로소가 10리길에 늘어섰다고 한다.

백선행의 소행은 자기 개인을 위해 바친 생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친 생은 민족사와 더불어 사람들의 기억속에 전해지게 된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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