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날자 : 2022-08-01

주체111(2022)년 8월 1일 《기사》

 

조선군대를 해산하고 군권을 강탈한 일제의 죄악

 

일제의 죄악에 찬 조선침략사에는 조선군대강제해산도 있다.

일제는 우리 나라에 침략의 발을 들여놓은 첫 시기부터 조선군대를 없애버리기 위하여 불법무도한 책동을 감행하였다.

당시 조선군대의 전체인원수는 9 000명정도이고 그나마도 편제와 무장장비도 보잘것 없었지만 일제는 조선군대해산을 조급하게 서둘렀다.

그것은 조선을 영구강점하는데서 조선군대의 반항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데 있었다.

특히 강도적인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의 날조를 계기로 조선인민들과 군대안에서 반일감정이 높아가고있는것은 일제침략자들을 매우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조선군대를 완전히 없애버림으로써 조선강점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군대

일제는 조선군대해산시 있을수 있는 군인들의 반일항전에 대처하여 본토로부터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사전에 폭압무력을 총동원하였다.

또한 조선군대해산의 합법적《명분》을 날조하는 간교한 조치도 취하였다.

교활한 일제는 군사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취하는 조치인듯 한 인상을 주는 이른바 《군대정리》라는것을 들고나왔다.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는 친일매국역들에게 《군대정리안》을 내리먹인 다음 이 계획실현의 직접적담당자로 당시 조선주둔 일본침략군의 우두머리였던 하세가와를 내세웠다.

일제는 조선군대해산날자를 8월 1일로 정하고 1차로 서울에 있는 시위보병 5개 대대, 기병대, 포병대, 교정대대를 해산시키며 2차, 3차로 지방에 있는 군대와 나중에는 군악대까지 해산하기로 하였다.

1907년 8월 1일 날이 밝아오자 서울시내는 일제침략자들의 삼엄한 경계밑에 들어갔다.

이런 속에서 조선주둔 일본침략군의 우두머리였던 하세가와는 8시 서울에서 조선군대의 부대장 및 구분대장회의를 소집하고 조선군대의 해산을 직접 통고하였다.

그리고는 장교들로 하여금 도수훈련을 한다고 병사들을 꾀여 해산식장소인 훈련원으로 무장을 가지지 않고 집결하도록 요구하였다.

10시 일제의 기병, 보병, 공병혼성부대들이 훈련원두리에 삼엄한 포위진을 펼친 가운데 조선군대해산식이 강행되였다.

이날 해산하기로 예정된 조선군대 총수는 3 100여명이였다. 그러나 훈련원에 빈손으로 모인 조선군대는 1 800여명이였다. 나머지 1 300여명은 이미 놈들의 간계를 간파하고 탈영하였으며 해산식장에 가지 않았다.

해산식참가를 거부한 군인들속에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있을 때 시위대 보병 제1련대 1대대장이 일제의 조선군대강제해산에 항거하여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자결은 병사들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켰다.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무장을 갖춘 다음 일제침략군을 족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치렬한 시가전끝에 일제침략군을 수많이 살상하였으며 적들의 포위를 뚫고나와 반일의병부대와 합류하였다.

시내의 한복판에서 일제침략군과 폭동군인들사이의 격전이 벌어지고있을 때 훈련원에서는 군대해산식이 감행되였다.

일제의 간계에 넘어가 항쟁대렬에 들어서지 못한데 격분한 애국적군인들은 일제가 주는 더러운 《은사금》을 쥐여뿌리면서 반항하였으나 빈손으로 일제야수들의 삼엄한 포위망속에 갇히운채 해산당하고말았다.

 

강제해산당한 조선군대

 

일제침략자들은 서울에서 조선군대를 강제해산시킨 다음 지방의 진위대들을 해산시키기 위한 책동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서울에서와 같은 수법으로 9월 3일까지 진위대가 전반적으로 강제해산당하였다.

해산당한 일부 군인들은 애국의 뜻을 품고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의병투쟁에 참가하였다.

일제가 조선군대를 해산시킨것은 실로 력사에 전무후무한 날강도적인 행위가 아닐수 없다.

우리 인민은 일제야말로 가장 포악무도하고 파렴치한 날강도무리,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쑤라는것을 뼈에 새기고 천백배 복수의 의지를 벼리고있다.

 



Facebook Twitter LinkedIn Google Reddit Pinterest KakaoTalk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