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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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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6(2017)년 3월 17일 [회고록]

 

위대한 주석님의 회고록에서 배운다

 

-대용단-

 

 

우리 나라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간부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화성의숙의 교육에 대한 환멸은 날이 갈수록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올랐다. 화성의숙은 위대한 주석님의 기대에 만족을 주지 못하였고 그이께서는 화성의숙의 기대를 충족시킬수 없으시였다. 화성의숙이 위대한 주석님께서 바라시는 그런 학교로 될수 없는것처럼 그이께서도 화성의숙이 바라는 그런 학생으로 될수 없으시였다. 화성의숙에 대한 위대한 주석님의 불만과 주석님에 대한 화성의숙의 불만은 서로 정비례하였다.

그이께서 당시 시대의 사조로 되고있던 맑스ㅡ레닌주의선진사상에 심취되면 될수록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지시였고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헤여나올수 없는 고민의 세계에 빠지시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것인가? 집에 돌아가서 삼촌대신 약방일이나 맡아가지고 가정살림을 돌볼것인가, 아니면 심양이나 할빈이나 길림과 같은 도회지에 가서 다른 상급학교에 진학할것인가.

이런 복잡한 심리적곡절끝에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시여 중학교를 다니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시였다.

그이께서 화전대신 길림을 내 운명의 다음정거장으로 선택하신것은 이 도시가 만주지방에서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요한 정치적중심지였기때문이다. 이런 리유로 하여 길림은 《제2상해》라고 불리우기까지 하였다. 중국관내에서는 상해가 조선혁명가들의 집결처였다.

그이께서는 화전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터치고 보다 광활한 무대에로 나가시여 《ㅌ. ㄷ》의 결성으로 첫 걸음을 뗀 공산주의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벌려보고싶으시였다. 이것이 위대한 주석님께서 화성의숙을 중퇴하시게 된 기본리유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 화성의숙을 다니시다가 반년만에 중퇴하고 길림으로 가신것은 그이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이시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청년학생들속에 들어갈 용단을 내린것이 정당한 처신이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화성의숙을 제때에 떠나지 않고 그 울타리속에서 맴돌았더라면 그이후 조선혁명을 급속한 앙양에로 승화시킨 모든 공정들이 그만큼 지연되였을것이다.라고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 학교를 그만두고 길림으로 가겠다고 하시자 《ㅌ. ㄷ》성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이께서는 그들에게 《ㅌ. ㄷ》를 내온것만큼 이제는 그 조직과 리념을 사방에 펼쳐가야 한다, 화성의숙에 주저앉아서는 아무 일도 못할것 같다, 이런 학교를 다녔대야 큰 보람도 있을것 같지 않다, 내가 간 다음 동무들도 기회를 보아 독립군부대나 적당한 고장에 자리를 든든히 잡고 《ㅌ. ㄷ》의 줄을 뻗치면서 대중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무들은 다 조직의 성원들인것만큼 어디에서 일하든지 조직의 통일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주시였다. 몇몇 동무들과는 후날 길림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화성의숙을 중퇴하는 문제를 두고 이미 화성의숙 총관이였던 김시우와도 의논하시였다.

《집에 가서도 의논해보겠지만 이거 뭐 화성의숙에 와서 공부해보니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돈은 없지만 길림에 가서 중학교에라도 다니고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이께서 이런 고백을 하시니 총관은 몹시 섭섭해하였다. 그러면서도 의숙을 그만두겠다는데 대하여서는 막지 않았다.

《자네가 그런 생각이 있으면 내 친구들과 의논하여 주선해주겠네. 사람마다 다 자기의 마음에 맞는 달구지가 있는 법이야. 화성의숙의 달구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네의 달구지를 타고 가게나.》

위대한 주석님께서 화성의숙에 오시는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환영해준 김시우가 그처럼 대범하게 리해하여주는 바람에 그이께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시였다. 총관은 최동오숙장이 섭섭해하지 않도록 중퇴하더라도 인사나 잘하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만나고 길림으로 갈 때에는 꼭 자기한테 들리라고 하였다.

김시우를 납득시키는 일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되였다.

그러나 최동오숙장과의 작별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동반하였다. 처음에는 선생이 노여움을 타면서 한참동안 위대한 주석님께 섭섭한 말을 하였다. 사내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그만이지 중퇴를 하다니 될말인가, 의숙의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퇴하겠다는데 이 어수선한 세월에 만사람의 구미를 다 맞출수 있는 그런 학교가 어디 있는가고 하면서 막 야단을 하였다. 그러다가 위대한 주석님을 등지고 창가를 향해 돌아섰다.

선생은 그 창가에서 눈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성주와 같은 수재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학교라면 나도 이 의숙에서 물러가겠네.》

선생이 폭탄처럼 내던지는 말에 그이께서는 몸둘바를 모르고 함구무언으로 서있으시였다.

잠시후 최동오선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위대한 주석님옆에 가까이 다가와 어깨우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

선생은 운동장에 나와서도 퍼그나 오랜 시간 위대한 주석님의 생활에 교훈으로 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었다. 선생의 머리와 어깨우에는 눈이 내려와 자꾸 쌓이였다.

그때를 회고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나는 그후 폭설속에서 나를 바래주던 숙장선생의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그날 선생의 어깨우에 쌓인 눈을 털어드리지 못한 실수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나 나와 최동오선생은 평양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나는 수상이고 선생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간부였지만 그 상봉은 역시 어쩔수 없는 스승과 제자의 상봉이였다. 화전에서 추켜들었던 . 의 리념은 전쟁의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한 이 땅에서 사회주의로 개화하고있었다.

결국 그때 성주수상이 정당했습니다!

선생이 웃으면서 나의 아명을 부르는 바람에 나의 추억은 수십년의 세월을 거슬러 눈내리던 화성의숙의 운동장으로 날아갔다.

곡절많은 정치생활의 파동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로스승은 아무런 설명도 주해도 붙어있지 않는 이 짤막한 말로 30년전에 있었던 나와의 대화를 결속지었다.라고 쓰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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