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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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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11월 20일 [련재]

 

3. 태양의 해발

그토록 념원하신 통일(1)

 

언제인가 판문점을 찾았을 때 알게 된 자료인데 우리 조국의 허리를 가로질러간 군사분계선의 총연장길이는 600여리이고 그로 하여 122개의 마을과 8개의 군이 갈라졌으며 514개의 부락이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끊어진 철길은 4개이고 크고 작은 도로는 220여개이며 토막난 강줄기와 시내도 116개나 된다고 한다.

《통일!》

이렇게 마음속으로 두 글자를 외워보면 가슴속에서 불뭉치 같은것이 불쑥 치밀어오르는것을 금할수 없다.

진정한 조선민족의 한 성원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단 두 글자이다. 하지만 이 말속에 얼마나 크고 절절한 우리 민족의 소원이 담겨져있는가.

외세에 의해 생겨난 그 38˚선으로 하여 민족이 분렬되고 국토가 량단으로 갈라지고 두 제도가 대립된 상태로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10년이 7번이나 흘러갔으니 말이다.

이제는 퍼그나 오래된 일이다.

나는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진행된 한 국제학술발표회에 참가하였던 조국청년과 우연히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되였다.

눈물이 글썽하여 그가 하는 말이 자기 가정은 북과 남, 해외에 흩어져있다는것이였다. 자기는 평양에 살고 아버지는 일본에 살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남조선에서 살고.

《이 일을 어쩌면 좋니? 어디 말 좀 해봐. 분명 그 청년도 보통사람일텐데 그런 불행한 운명을 그저 감수하며 일생을 살아야 할가?》

이것은 내가 그때 만나는 친구들마다에게 한 말이였다.

아니, 내자신에게 던진 물음이기도 하였다.

민족이란 하나의 생명유기체와도 같은것이며 매 성원들은 민족의 살점과 같다고 볼수 있다.

산 생명체가 여러 쪼각으로 갈라질 때 매 부분들은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 민족의 고정구호처럼 된 통일만이 살길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것일것이다.

외세에 의해 찢겨져나간 그 살점들을 되찾아 붙이고 잘리운 국토의 허리를 이어놓아 온 민족이 한지붕아래 모여 옛말하며 행복하게 살자는것, 이것은 위대하신 김일성주석님께서 한평생 바라시던 최대의 숙원이였다.

조국통일을 위해 해방후부터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주석님께서 바치신 심혈과 로고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그분께서 남기신 아홉 글자의 친필이 먼저 떠오른다.

김 일 성

1994. 7. 7.

칠월칠석날이였다.

칠월칠석은 하늘나라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전설의 이야기가 담긴 날이여서 참으로 신묘한 날이라고 생각되였다.

사실 칠월칠석은 음력으로 쇠는 날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1896년부터 서력기원을 리용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속에서는 음력만이 아니라 양력으로 7월 7일이 되여도 칠월칠석으로 여기게쯤 되였다.

그 시각 조국통일문건을 비준하시면서 다가올 민족사적대사변을 그려보시였을 주석님께서는 얼마나 환희에 넘쳐계셨을가.

주석님의 심중을 나의 밭은 소견으로 다 헤아릴수는 없지만 분명 북과 남의 인민들이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출 통일오작교를 그려보시였으리라.

이처럼 조국의 통일을 위해 자신의 심신을 깡그리 불태우신 주석님의 뜻을 가장 충직하게 받들어온 전사가 바로 김정숙녀사이시였다.

눈보라만리, 불바다만리를 헤치시며 끝끝내 해방의 환희를 안으시고 녀사께서는 1945년 11월 25일 꿈결에도 그리시던 조국땅 함경북도 선봉군(오늘의 라선시 선봉지구)에 개선의 첫 자욱을 새기시였다.

하지만 그때 백두산천지에서 제주도 끝까지 한지맥으로 잇닿은 하나의 강토, 반만년의 피줄을 이으며 하나의 력사와 문화속에 살아온 우리 겨레는 북과 남으로 갈라지면서 비극적분렬의 첫페지를 펼치고있었다.

피어린 항일의 철화속을 헤쳐오시며 녀사께서 그려보신것은 주석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에서 화목하고 단란하게 사는 하나의 나라였지 분렬된 강토가 아니였다.

녀사께서는 해방의 감격과 환희로 들끓는 조국땅에서 시시각각으로 갈라진 민족의 원한, 남녘땅에 차고넘치는 겨레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며 가슴에이는 고통을 날이 갈수록 크게 체험하시였다.

백가지 기쁨도 한가지 불행을 가셔주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더우기 주석님께서 하나의 강토를 그려보시며 남녘동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휴식도 주무심도 잊으시고 모든것을 바치고계시는것을 몸가까이에서 체험할수록 녀사의 마음속 상처는 더욱 쓰리고 아프시였다.

녀사께서는 어제날 백두의 설한풍속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걸으시던 그 걸음을 쉼없이 통일애국의 길로 이어가시였다.

해방직후 남조선기자들이 평양에 처음으로 왔을 때였다.

주석님께서는 그토록 바쁘시였지만 그들을 위해 친히 시간을 내시고 이런 내용의 교시를 하시였다고 한다.

우리들이 비록 서울에는 가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남조선동포들에게 가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북조선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빨찌산투쟁을 할 때도 전조선을 해방하기 위해서였지 결코 북조선만을 위해서가 아니였다. 미국놈들때문에 우리가 지금 서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남조선인민들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는것을 꼭 전해달라. …

주석님의 이 교시를 가슴속에 되새기시는 녀사의 안타깝고 통절한 심정은 참으로 무엇이라 표현할길 없으시였다.

주석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녀사이시였다.

하건만 주석님을 삼천리조국강산에 높이 모시려는 그 숙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녀사에게는 일각이 삼추처럼 여겨지시였다.

통일! 그것은 녀사의 최대의 념원으로 되였다.

녀사께서는 조국통일을 주석님께 충직한 전사의 첫째가는 혁명임무로 받아안으시였으며 모든 삶과 투쟁의 최고목표로 정하시였다.

녀사의 마음은 언제나 남녘동포들에게로 달리시였다.

식민지노예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당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을 생각하시며 밤잠도 이루지 못하신 녀사이시였다.

력사적인 로동법령이 발포된 직후인 1946년 6월말의 어느날이였다.

《김장군께 무한히 감사》, 《로동법령을 쌍수를 들어 환영》, 《드디여 임금노예에서 해방》 등의 제목으로 된 각계 근로자들의 반향기사가 가득 실린 신문을 기쁘게 보시던 녀사의 눈빛은 흐려졌다.

남조선로동자들의 기막힌 생활난을 자세히 소개한 기사때문이였다.

그날 한 일군에게 녀사께서는 남조선의 현실에 대하여 알려주시면서《우리가 산에서 싸울 때 3천만인민을 다 해방하자고 그리도 많은 피를 흘렸는데 아직도 나라의 절반땅에서는 우리 인민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짓밟히고있으니… 정말 가슴이 아프군요. 그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요.》라고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행복에 겨워 웃는 자식보다 불행에 우는 자식을 더 생각하는 친어머니의 마음 그대로였다.

녀사께서는 남조선에서 미국놈들을 내쫓고 남조선인민들에게도 하루빨리 민주주의적혜택이 차례지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후 두달이 지난 8월말, 주석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립될 때에도 녀사께서는 남녘동포들을 생각하시며 주석님의 구상이 하루빨리 전조선적으로 실현될것을 절절히 소망하시였다.

하루는 주석님께서 녀사께 새로 창립된 로동당의 강령초안의 내용을 설명해주시면서 당강령에 민주주의적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 남녀평등권 등 제반민주개혁들과 민주주의적시책들을 전조선적으로 실시할데 대한 문제들이 반영될것이라고 하시자 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사실 우리가 산에서 투쟁할 때 전조선을 해방하자고 투쟁했지 나라의 절반땅만 해방하자고 그 고생을 했겠습니까. 일제통치를 청산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세우며 일제와 예속자본가, 친일지주들이 가지고있는 공장, 광산, 농장토지를 몰수하고 8시간로동제를 실시하며 녀성해방을 실현할데 대한 문제 등 모든것이 다 담겨져있었는데 우리는 그때 벌써 그 강령을 전조선에서 실시하자고 싸우지 않았습니까.》

녀사의 말씀은 절절하였다.

녀사께서는 조국의 완전한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주석님의 참된 동지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수 없다고 생각하시였다.

력사적인 북조선로동당창립대회가 끝나던 날 경위대원들이 녀사께 주석님과 함께 뜻깊은 이날을 맞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는것을 말씀드렸을 때였다.

《지금 장군님께서는 북조선에서의 합당사업에 이어 남조선에서 공산당과 신민당, 인민당의 합당사업때문에 매우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계십니다.

지금은 장군님께서 시간을 내실것 같지 못해요.》

녀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경위대원들은 그러면 녀사께서만이라도 함께 사진을 찍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다시 청을 올렸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사진을 찍어야 영광스러운 일이지 자신과 찍어서 무슨 기념이 되겠는가고, 남북이 통일되고 전조선적으로 제반 민주개혁이 성과적으로 수행되여 온 나라 인민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될 때 우리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날 우리 함께 남해바다가에 가서 사진을 찍읍시다.》

기쁜 날이나 의의깊은 기회에 기념사진을 남기는것은 보통 인간들의 심리이며 생활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조차 조국통일을 그리시고 남녘인민들을 생각하시면서 경위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시는것도 뒤로 미루는 녀사의 뜨거운 말씀을 새겨보며 나는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녀사께서 해방후에 찍으신 사진들을 많이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나마도 녀사께서 밝게 웃으시며 찍으신 사진은 별로 없었다.

분렬의 고통과 아픔이 녀사의 심중에 너무도 가득차있어서가 아니였을가.

1947년 4월 15일에 있은 일이다.

이날 주석님의 댁에는 만경대의 할머님을 비롯하여 일가친척분들이 찾아왔다.

그날 한 친척분이 녀사께 왜 녀사켠에서는 아무도 오시지 않았는가고 하며 이제라도 편지를 내서 다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다.

녀사께서는 그 말이 정말 고마우시였다.

문득 녀사의 심중에는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떠올랐다.

1933년 겨울 유격구에 달려드는 왜놈들로부터 인민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적들을 유인하고 희생된 동생.

위로하는 동지들에게 자신은 오히려 장한 일을 한 내 동생을 자랑하고싶다고 하셨지만 홀로 계실 때에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 못하신 녀사이시였다.

이 기쁜 날 언니와 조카를 찾아 탄생을 맞으시는 주석님께 축원의 인사를 올리게 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무 말씀이 없이 한동안이나 한곳에 눈길을 보내시던 녀사께서는 마음을 굳히시며 말씀하시였다.

《…빨리 나라를 통일해서 우리 형제들을 다 찾겠습니다. 그들을 꼭 만나게 될것입니다. 통일된 강산에서 이렇게 모두 만나게 되면 더 좋지 않습니까.》

자신의 행복도 기쁨도 오로지 주석님께서 그토록 바라시고 념원하시는 통일을 이룩한 다음에야 찾으시려는것이 녀사의 가슴속에서 끓어번지는 일념이고 소망이였다.

하기에 남조선에서 들어온 통일애국투사들을 만나시여서도 마음 같아서는 나도 동무들과 같이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에 떨쳐나서서 장군님의 심려를 덜어드리고 싶다고, 그러니 동무들이 내 마음도 합쳐서 조국통일을 위한 장군님의 심려를 덜어드리기 위해 앞장서 싸워달라고 절절히 부탁하신 녀사.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이면 혁명하는 사람이 자기의 초보적인 임무를 마쳤다고 할수 있을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던 녀사이시였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녀사의 하루하루는 이렇게 통일념원을 기어이 이룩하실 굳은 결심으로 흘렀다.

1949년 5월 5일, 군사분계선일대에서 근무하던 남조선 《국군》 2개 대대가 분계선을 넘어 용약 공화국북반부로 의거해왔다.

이 대대들로 말하면 당시 38˚선에 배치된 《국군》 8개 대대중의 주력으로서 미국회 하원 군사시찰단의 시찰대상으로 선정되여있었으며 1948년 이른봄부터 남조선군부우두머리들이 직접 현지에서 《림전태세》를 《검열》한다, 《보강》한다 하며 소란을 피우던 구분대들이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이 두개 대대의 의거입북은 그해 5월 중순에 저들의 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국군》의 《전투태세》를 사찰 확인하고 전면전쟁을 일으키려던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에게 심대한 타격으로 되였으며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싸우는 조국인민들에게는 커다란 고무와 신심을 주었다.

이를 두고 더없이 기뻐하신 주석님께서는 해당 일군들에게 이들에 대한 환영사업을 잘 조직할데 대한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주석님의 그 뜻을 가슴속에 새기신 녀사께서는 그들에 대한 환영사업을 몸소 세심히 조직해주시였다.

그리고는 자신께서도 몸소 이 사업에 참가하실 준비를 하시였다.

녀사께서는 자유와 광명을 찾아 사선을 헤치고 의로운 장거를 단행한 남조선의 청년들에게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마음을 전할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시다가 진달래꽃다발을 안겨주리라 결심하시였다.

진달래!

진달래는 조국땅 그 어디에나 피는 꽃이다. 중국의 동북지방에도 봄철때면 만발하는 결코 희귀한 꽃이 아니다.

왜 녀사께서는 하많은 아름다운 꽃들중에서 굳이 진달래꽃을 그들에게 안겨주시려 하시였을가.

나의 눈앞에는 떠올랐다.

1939년 5월 주석님을 모시고 조국땅 무산지구에로 진출하신 녀사를 비롯한 항일빨찌산들을 제일먼저 반긴 진달래.

주석님께서 조국의 진달래는 볼수록 아름답다고 하시며 그토록 사랑하신 진달래.

사나운 비바람, 눈보라를 이겨내고 새봄을 불러오며 활짝 피여난 연분홍진달래의 그윽한 향취에서 해방된 조국땅을 그려보시며 눈물지으셨던 녀사이시였다.

녀사께서는 어리신 아드님과 함께 손수 연분홍진달래꽃을 한송이, 두송이 정성들여 만드시였고 환영연도에도 나가시여 그것을 두 대대장과 병사들에게 안겨주도록 하시였다.

꽃은 인간의 마음과 함께 뜻을 나타낸다고 한다. 하여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수없는 마음을 꽃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녀사께서 안겨주신 진달래꽃다발에는 단지 환영의 뜻만이 깃들어있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참다운 조국을 알고 한생토록 통일성업실현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라는 크나큰 믿음도 어려있은것이 아니였겠는가.

녀사께서 그처럼 바라시던 조국통일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민족은 합치면 강해지지만 대결과 정쟁을 일삼으면 쇠약해져 강대국들의 롱락물로 되고만다는것은 력사가 주는 심각한 교훈이다.

하기에 남녘에 고향을 둔 조국의 한 시인은 분렬의 비극이 이대로 지속되면 장수의 노한 칼로 지구의 공전을 멈춰세우겠다고 열변을 토한것이 아닌가.

이제 더는 통일이 우리의 소원으로만 될수 없는것이다.

나는 김정은시대의 거족적인 통일성전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선 우리 민족은 반드시 주석님의 뜻을 받들어, 녀사께서 그토록 절절히 바라신 념원을 받들어 이 땅우에 통일된 강성조선을 일떠세울것이라는것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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