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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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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11월 30일 [련재]

 

4. 변함없는 모습

 

걱정중의 걱정

 

사람들은 흔히 기쁨이나 만족보다 고민과 걱정에 자기의 인간상을 더 뚜렷이 담게 된다.

하다면 김정숙녀사에게 있어서 걱정중의 걱정은 무엇이였고 거기에는 또 녀사의 어떤 정신세계가 비껴있는것인가.

1947년 3월 중순 어느날 녀사께서는 어느 한 극장을 찾으시였는데 공연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극장 앞마당에 이르신 녀사께서는 함께 온 일군에게 수고스러운대로 구경표를 좀 사달라고 돈을 주며 부탁하시였다.

그 일군은 송구해하며 녀사께서 오셨다는것을 극장 책임일군에게 알려주려 하였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는데 우리라고 극장질서를 어겨서는 안된다고 신중하게 이르시였다.

사실 그날 녀사께서는 극장운영정형과 문학예술부문의 실태를 깊이 료해하여 주석님께 보고드리시려고 극장으로 나오시였던것이다.

그러나 녀사께서는 사소한 특전도 허용하지 않으시였다.

결국 녀사일행은 구경표를 사가지고 혼잡을 이룬 사람들과 어울려 극장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수없이 많다.

1948년 5월 어느날, 녀사께서는 한 녀투사와 함께 어느 한 시장에 나가게 되시였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였다. 필요한것이 제기되면 언제나 자신께서 직접 상점이나 시장 등을 다니군 하신 녀사이시였던것이다.

녀사일행이 어느 한 잡화점옆을 지날 때였다.

몇명의 녀인들이 주고받는 말이 녀투사의 귀전에도 와닿았다.

《김정숙녀사님은 어떤분이실가? 한번 먼발치에서라도 뵈웠으면…》

녀투사는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온 민족이 절세의 애국자,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러받드는 김일성주석님 부인이 어떤분이실가 하는 호기심은 이 나라의 녀인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것이라고 볼수 있지 않을가.

녀인들의 눈빛에는 한없는 동경과 호기심이 짙게 어려있었다.

그들은 갈길을 잊은듯 이야기에만 열중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뵐수 있겠어요.》

《그럼요. 그분께서야 높은 대문안에 계실텐데…》

《하긴 산에서 왜놈들과 싸우시느라고 오래동안 고생하셨는데 이젠 좀 편히 지내실 때도 되였지요.》

녀투사의 얼굴에는 허구픈 웃음이 비꼈다.

녀사를 깊은 대궐안에서 비단옷을 떨쳐입고 많은 시중군들을 거느리며 위엄있게 앉아있던 그 옛날 왕궁의 왕후처럼 여기는 그들의 사고가 어이없었기때문이였다.

바로 그들이 자기들곁에 보통고무신을 신고 수수한 무명옷을 입고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가시는분이 항일대전의 나날에 그처럼 명성을 떨치신 녀장군이시라는것을, 그처럼 뵙고싶어하는분이시라는것을 안다면 얼마나 놀랄것인가.

하여 녀투사는 간곡히 청을 올렸다.

《지난날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이제는 옷도 좀 좋은 천으로 해입으시고 시장에 나드는 일도 그만두십시오.》

생각깊으신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으시던 녀사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저는 늘 여느 사람들과 꼭같이 먹고 입는것이 제일 행복해요.

…우리가 만일 산에서 싸웠다고 하여 행세를 하거나 편안히 지내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저는 언제나 그것이 제일 걱정되여요.》

녀투사는 가슴이 쩌릿해졌다.

하지만 녀사의 이 말씀은 그저 겸허하고 소박한 풍모에서만 나온것이 아니였다.

어느날 한 녀성일군이 녀사를 만나뵙자 이렇게 인사를 드리였다.

《사모님, 어데 갔다오시는 길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녀사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주석님을 호위하는 경위대원들도, 녀성일군들도, 동네녀인들도 녀사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사모님》이라는 그 호칭에 가득히 담았다.

그러나 녀사께서는 그때마다 몹시도 거북해하시며 거듭 만류하시였다.

그날도 녀사께서는 인사를 올린 녀성일군을 나직이 책망하시였다.

《다시 말해봐요. <사모님>이라고.

듣기에도 거북하게 <사모님>이 뭐예요. 나는 <사모님>이라고 부르는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들에게는 동무, 동지라는 좋은 말이 있지 않아요.》

《저, 그렇게야 어떻게…》

《…동무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니까 정 나를 존경하여 부르겠으면 차라리 형님이라고 부르는것이 더 나을게 아니예요. …

앞으로 다시 <사모님>이라고 부르면 되게 혼을 내우겠으니 약속을 꼭 지켜야 해요. 다른 녀성일군들속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회의를 열고 비판을 주겠어요.》

녀사와 헤여지면서 녀성일군은 조용히 불러보았다.

《형님! 아니 정숙동지!》

어느것이나 무척 입에 설었다.

그러는 속에 슬며시 이런 의문이 갈마들었다.

《사모님》이란 부름을 왜 그토록 마다하시는것일가?…

1948년 1월 2일 만경대의 조부모님들께 새해인사를 드리러 가시였던 길에 녀사께서는 모여온 마을녀인들과 오락회를 하게 되시였다.

누군가가 《사모님께서 먼저 노래를 불러주십시오.》라고 청을 드리였다.

녀사께서는 그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였다.

모두들 숨소리를 죽이며 기다리는데 녀사께서는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생각되는바를 한마디 하겠다고 하시는것이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그렇고 어디 가서나 듣게 되는것은 <사모님>이라는 말입니다. …

사람들간에 차이가 없고 부강한 새 조국을 건설할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일해나가는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혁명동지들이예요.

동지라는 말은 서로 뜻을 같이한다는 말입니다.

지난날 산에서 싸울 때 우리는 서로 동지라고 불렀습니다.

해방된 오늘 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건국을 위한 일에 떨쳐나선 사람들은 다 동지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서로 동지라고 부르자요.》

《스승의 부인》,《존경하는 사람의 부인》을 이르는 말인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웬만한 녀성들도 받군 하는 그 부름말을 녀사께서는 왜 그리 받아들이지 않으셨는가.

이런 물음이 나의 머리속에서 떠날줄 몰랐다.

…어느날 한 녀투사는 녀사에게 어째서 집안에서도 사령관동지, 장군님, 이렇게 부르면서 그리도 어렵게 대하시는가고. 좀더 다정하고 허물없이 부를수도 있지 않은가고 불쑥 물었다.

그때 녀사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장군님은 우리 민족의 태양이시고 우리 인민의 심장이시며 우리 혁명의 운명이시예요. 나는 장군님을 보위하고 잘 받들어모셔야 할 조선의 혁명가로서의 책임과 임무를 그 누구보다 무겁게 지니고있는 그이의 전사예요.

김정숙은 백번 죽었다 천번다시 살아난대도 장군님의 전사이지 달리는 될수 없어요.

그래서 나는 밖에서나 집안에서나 언제나 그이를 사령관으로, 온 민족이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절세의 애국자, 민족적영웅으로 모시고 대하는것이예요. …

녀투사는 경건한 마음으로 녀사를 우러렀다.

녀사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시였다가 자신께서 이런 립장에 서지 않으면 장군님을 모시는 자세가 쉽게 헝클어질수 있다고 하시며 이렇게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내가 제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것이 바로 이것이예요.

그래서 나는 자나깨나 나는 장군님수하의 전사다, 전사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하고 장군님앞에 서군 합니다.

나는 눈에 흙이 들어가는 날까지 장군님을 모시는 전사의 이 자세를 절대로 헝클어뜨리지 않을것입니다. …

달리는 될수 없는 장군님의 전사!

녀사의 마디마디의 말씀이 내 심장을 쾅쾅 울려주었다.

그러는 속에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1945년말에 새길신문사의 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 기자들은 녀사께서 청진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급히 녀사와의 기자회견을 조직하여줄것을 제의하였다.

그들의 제의는 쾌히 수락되여 녀사를 만나뵙게 되였다.

기자들은 녀사를 만나자마자 녀성의 몸으로 만주광야를 주름잡으며 일제의 백만대군과 싸워이긴 이야기를 듣고싶어 찾아왔다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일제통치밑에서 얼마나 고생들을 했는가고 하시면서 해방된 조국에서 신문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수고도 깊이 헤아려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다만 장군님께서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던 이야기는 얼마든지 말씀드릴수 있다고 하시였다.

녀사의 이야기는 시종 항일무장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오신 주석님의 탁월한 전략과 전법들, 함께 싸우던 전우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자회견이 거의 끝날 때까지도 녀사자신에 대하여서는 단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시였다.

하여 한 기자는 《녀사의 생애에 대하여 알고싶습니다.》라고 말씀올렸다.

하지만 녀사의 립장은 철저하시였다.

신문에야 마땅히 위대한 장군님에 대하여 써야 한다고 하신 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전사들의 이야기는 수령의 력사속에 있는게 아닙니까. 그러니 장군님에 대해서 쓰세요.》

신문에 녀사의 공적을 크게 소개하려던 자기들의 소원을 실현하지 못하게 된 기자들에게 녀사께서는 앞으로 신문에 장군님의 로선과 방침을 잘 해설하여 대중을 새 조국건설에 적극 떨쳐나서게 하여달라고 부탁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새길신문》 1면에는 《열혈 14세 소녀의 몸으로 혁명운동에 투신》이라는 제목아래 《김녀사의 반생》이라는 부제목을 단 크지 않은 기사가 실리게 되였다.

그 기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의 혁명가 김일성장군님 부인 김정숙녀사는… 간도 연길현 부암에서 14세 소녀의 몸으로 불붙는 혁명열을 못이겨 원대한 포부를 품고 가정을 뛰여나와 만주에서 일본군벌의 맹렬한 백색테로밑에서 독립을 위하야 혈투하는 김일성유격부대에 감연 참가하였다 한다.

직접 무기를 들고 선두에서 유격전에 출동하여 싸워 생명의 위험이 한두번이 아니였다고 한다. …》

나는 그 자료를 보면서 녀사께서 지니신 한없이 고결한 정신세계와 이룩하신 하늘같은 업적에 비해볼 때 너무도 기사가 왜소하다고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회억하면서 나는 당시의 목격자였던 한 녀투사가 크나큰 흥분으로 썼을 글줄들을 다시금 더듬었다.

녀투사의 감정의 분출인듯 한 글줄들이 나의 감정을 더욱 승화시켜주었다.

《김정숙동지는 바로 이런분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언제나 나는 장군님수하의 전사라는, 전사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세를 바로하고 장군님앞에 나서시군 하시였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장군님을 모시고 받드는 전사의 자세를 유지하시였다. …》

주석님을 한번만이라도 뵈온 사람들은 그가 누구든 한결같이 그분은 세상에서 제일 인자하신분이시라고 격찬하며 감동을 금치 못한다.

그런 주석님앞에 계시는 녀사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둥처럼 굳건히 버티고있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순간도 흐릴수 없는 전사의 고결한 자각이라는것을 나는 똑똑히 새길수 있었다.

결국 녀사께서 장거리에서 녀투사의 절절한 청을 마다하신것도,《사모님》이라는 례사로운 호칭을 그처럼 간곡히 만류하신것도 주석님을 모시는 자세가 헝클어질가봐 걱정되여서였던것이다.

나는 녀사의 걱정중의 걱정은 주석님을 더 잘 모시고 더 잘 받들려는 전사의 변함없는 충직한 마음에서 나온것임을 가슴속에 깊이 새기게 되였다.

그 《걱정중의 걱정》에 비낀 녀사의 고결한 세계를 받아안았을 때 나의 마음은 크나큰 격정에 휩싸였다.

녀사께서는 자신의 변함없는 그 충정심을 어리신 아드님에게도 소중히 심어주시였다.

1948년 8월 17일, 녀사와 어리신 김정일장군님께서 조국해방 3돐기념 대전람회장을 돌아보시다가 만경대고향집모형앞에 이르시였을 때였다.

어리신 아드님께서 고향집모형을 가리키시며 저기가 바로 아버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라고 하시자 녀사께서는 생각깊은 어조로 바로 저 집에서 아버님께서 탄생하시였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어리신 나이에 집을 떠나 왜놈들과 싸우시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자 아드님께서는 어머니도 아버님처럼 왜놈들과 싸우지 않으셨는가고, 그러니 어머니도 아버님처럼 장군이 아닌가고 물으시였다.

그때 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장군이 아니다. 그저 아버님의 전사였다. 아버님은 장군이시기때문에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놈들과 싸웠지만 나는 다만 아버님의 전사로서 왜놈들과 싸웠을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녀사께서는 다시금 그루를 박으시였다.

《아버님은 장군이지만 어머니는 전사다.》

녀사께서는 나는 눈에 흙이 들어가는 날까지 장군님을 모시는 전사의 이 자세를 절대로 헝클어뜨리지 않을것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한치도 어기지 않으시였다.

위독해지는 병세로 더없는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현지지도를 떠나신 주석님의 사업에 지장이 된다고 전화도 못하게 하신 녀사.

자신의 병보다 주석님의 사업을 더 먼저 생각하시며 급히 병원을 찾아오신 그분을 오히려 밝은 모습으로 떠미신 녀사이시였다.

《장군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 저때문에 너무 근심마시고 어서 돌아가 보시던 일을 마저 보십시오. 치료를 받으니 정신이 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치료를 좀더 받고 곧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녀사의 이 변함없는 충정의 마음을 주석님께서는 수십년세월이 흐르도록 잊지 못해하시였다.

《김정숙의 한생은 나를 위해 바친 한생이였다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그는 나와 결혼한 다음에도 시종일관 나를 사령관으로, 지도자로, 수령으로 내세워주고 받들어주었습니다. 나와 김정숙과의 관계는 수령과 전사와의 관계, 동지와 동지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김정숙은 자기를 늘 수령의 전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날까지 나보고 보통 집안에서 쓰는 호칭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부를 때에는 그저 <장군님>이라고 하든가 <수상님>이라고만 하였습니다.》

주석님과 녀사께서 군복차림으로 밝게 웃으며 찍으신 사진, 주석님께서 결혼사진이나 다름없다고 하신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 3. 1. B야영구에서》라는 주석님의 친필이 뒤면에 새겨져있는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을 독자들이 우러르노라면 이 김정숙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라고 하시는 녀사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될것이다.

그리고 이런 음성도 들을수 있을것이다.

《전사들의 이야기는 수령의 력사속에 있는게 아닙니까.》

글을 쓰는 이 시각에도 나는 생각한다.

녀사의 《걱정중의 걱정》을.

그리고 이처럼 자기 수령께 끝없이 충직한 혁명가, 참된 동지가 이 땅 그 어디에, 그 언제 있었으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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