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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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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12월 4일 [련재]

 

4. 변함없는 모습

 

스스로 걸머지신 운명

 

해방직후 김정숙녀사께서는 갓 결혼한 부관장이 언제 한번 안해와 이야기를 나눌 짬도 없이 지내는것을 늘 가슴에 걸려하시였다.

하여 어느 하루 녀사께서는 김일성주석님께 부관장에게 색시를 데리고 산보할 시간을 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조용히 청을 드린 일이 있었다.

그때 주석님께서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내가 그 동무에게 색시를 데리고 산보하라고 하면 산보할것 같은가고, 우리들이나 그 동무가 한가하게 산보하지 못하는것은 조선혁명이 준 운명이라고 교시하시였다.

그 순간 녀사의 눈굽에서는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

어려운 한고비를 넘기면 그보다 더 어려운 고비가 또 가로막아나서고 그래서 언제 한번 편히 휴식할수 없었던것은 아마도 주석님과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내려진 운명인가싶었다.

무장을 잡고 빨찌산투쟁을 시작하던 때로부터 세여보아도 10여년, 그 나날에 조국과 겨레의 운명을 두고 그토록 마음쓰시며 밤잠조차 편히 들지 못하신 주석님.

장백의 사나운 눈보라속에서 얼음을 깨물며, 사선의 문턱을 넘나들며 주석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천신만고를 생각할수록 녀사의 마음은 쓰리고 아프시였다.

혈전만리를 헤치시던 그 항일전의 나날 주석님께서는 힘겨워하는 대원들에게 이제 나라를 찾고 조국으로 돌아가면 대동강에서 숭어를 잡고 평양랭면도 시원히 들면서 휴식도 마음껏 하고 밀렸던 잠도 실컷 자보자고 고무해주시였었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개선하는 자기의 장한 아들딸들에게 편안한 잠자리와 푸짐한 성찬이 아니라 단 하루의 휴식도 허용하지 않고 아름찬 일감부터 떠안겨주었다.

항일대전도 전인미답의 길이였지만 새 조국건설도 초행길이였던것이다.

어찌하여 조선혁명은 이처럼 간고한것이며 어쩌면 주석님께 이토록 무거운 짐만을 계속 덧쌓아드린단 말인가.

그날 녀사께서는 저려오는 가슴에 저도 모르게 손을 얹으시며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

내가 이런 이야기를 먼저 펼친것은 화제의 그 부관장의 안해가 후날 남긴 소중한 추억담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가 계속되던 1947년 삼복철의 어느날 점심시간에 댁에 들어오신 주석님께서는 무척 놀라와하시였다.

녀사께서 들고나오시는 세면물소랭이에 둥둥 떠있는 얼음덩이, 보기만 해도 땀이 잦아들듯 한 그 물에 손을 잠그시며 주석님께서 정말 시원하다고, 이렇게 더운 때에 얼음이 어디서 났는가고 물으시였다.

수건을 들고 주석님의 곁에 서계시는 녀사의 얼굴에는 봄날 같이 밝은 미소가 피여올랐다.

잠시후 식사를 마치신 주석님께서 방안에 들어서시니 마치 동굴안에 들어선듯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것을 느끼시였다.

그러나 방안의 구석구석에 큰 얼음덩이를 담은 그릇들이 놓여있는것을 보신 주석님의 눈굽은 오히려 뜨겁게 달아오르시였다.

그 얼음은 전해 겨울에 녀사께서 대동강가에 나가시여 가져다가 벼겨속에 차곡차곡 묻어 정성스럽게 건사하시였던것이였다.

지금은 웬만한 집이면 랭동기, 선풍기 등을 다 갖춰놓고 살지만 그때는 그런 가정용품들이 주석님의 댁에 없었다.

하늘에 닿을 녀사의 끝없는 정성이 그 모든것을 대신하였다.

겨울의 흔하디흔한 얼음덩이, 그것을 한여름까지 보관하는 방법도 알고보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실천한다는것은 그리 헐한 일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길은 있는 법이다. 누구도 따르지 못할 녀사의 지극한 마음이 그런 방도를 생각해낸것이였다.

수십년전의 일이였지만 그날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날 밤에는 녀사께서 부관의 안해와 이야기를 나누시며 주석님을 기다리신적이 있었다고 한다.

누워서 쉬다가 장군님께서 들어오실만 한 시간에 일어나도 되지 않는가고 하는 부관의 안해에게 녀사께서는 장군님의 일을 덜어드리지 못하는것만도 죄스러운데 누워서 기다리면 되겠는가고 말씀하시였다.

그런데 어느결에 녀사께서도 녀인도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빡 졸게 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가벼운 인기척에 녀사께서 펀뜻 눈을 뜨시니 주석님께서 벌써 방안에 들어서고계시였다.

주석님께서 그지없이 인자하신 어조로 왜 자리에 편히 누워 쉬지 않는가고, 피곤한데 앉아 새울 필요가 어디 있는가고 교시하시자 녀사께서는 말씀하시였다.

《그만 부주의해서 깜박 졸았댔습니다.》

그러자 주석님께서는 부관에게 우리가 잘못했다고, 전화로 몇시에 들어간다는것을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그동안 한잠 쉬였을걸 그랬다고, 래일부터는 들어갈 시간을 꼭 알려주도록 하자고 이르시였다.

정말 다음날부터는 부관이 전화로 퇴근시간을 알려오군 했다.

그랬어도 녀사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전번날은 내가 잘못했어. 장군님이 들어오시는줄도 모르고 졸았으니 글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어요.》라고 부관의 안해에게 말씀하시며 더욱 각성하여 주석님을 기다리시였다.

녀사께서도 보통인간이시였다. 피로하면 졸음이 몰려와 눈섭 하나의 무게를 천근, 만근으로 느끼시는, 남들과 다름없는 인간이시였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시는데서는 비상한 의지력을 지니신 남들과 다른분이시였다.

하다면 주석님께서 쉬실 때만이라도 녀사께서는 편히 쉬시였는가.

그렇지도 않다.

해방후의 옛 경위대원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어느날 새벽 2시경, 저택 보초근무를 교대하고 들어가려던 나는 세면장에 불이 켜있는것을 보고 누가 부주의로 그냥 나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리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김정숙어머님께서 세면장에서 나오시며 나더러 서라고 손짓하시는것이였다. 그리고 나의 귀에 대고 장화에 박은 징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장군님께서 휴식하시는데 발뒤축을 들고 앞축으로 조용히 걸어다니라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 다시 세면장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님을 보던 나는 그만 아연해졌다. 어머님께서 맨발로 걷고계셨던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빨래를 하시는데 어찌나 조용조용 하시는지 인기척조차 느낄수 없었다. …》

소리를 내지 않고 빨래를 한다는것은 빨래를 하는 일외에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두가지 수고가 겹친 일이다.

그때 경위대원은 녀사께서 그 깊은 밤에 부디 그런 빨래를 하셔야 했는지 미처 다 깨닫지 못하였다.

이른 새벽이면 우짖는 새들을 장대로 날리시며 주석님의 휴식을 지켜드리시고도 녀사께서는 밤에는 또 밤대로 《보초근무》까지 스스로 서시였다.

어찌 보면 녀사께서는 태여나실 때부터 고생을 타고나신분이 아닐가. 애당초 녀사의 삶에서 편안과 휴식은 삭제된 부분이였을가 하는 외람된 생각이 들 정도로 그분의 인생의 갈피갈피에 지꿎게도 새겨져있는 고생의 자취.

주석님께서는 녀사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사람들의 가슴이 허벼드는 이런 교시를 하시였다고 한다.

《나는 그가 단 하루라도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살았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일생동안 고생만 시키다가 먼저 보낸것이 제일 가슴아픕니다.》

어쩔수없이 맞다들게 되는 처지나 기회를 가리켜, 이미 정해져있는 피할수 없는것을 가리켜 운명이라고 한다.

하다면 이것 역시 조선혁명이 녀사께 안겨드린 운명이였단 말인가.

1990년 9월 9일, 주석님께서는 해방직후 녀사께서 부관장에게 산보할 시간을 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청하시던 일을 회고하시며 이렇게 뒤를 이으시였다.

《그때로부터 어느덧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추억은 혁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공산주의혁명가들만이 할수 있는 특전이라고 긍지높이 말할수 있습니다.》

김정일장군님께서도 언제인가 이런 추억깊은 교시를 하시였다고 한다.

《우리 어머님은 수령님을 받드시는 길에서 고생도 많으셨습니다. 어머님은 고생을 락으로 삼으시다가 돌아가시였습니다.》

주석님의 끝없는 헌신과 로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애쓰신 녀사의 남다른 고생, 그것은 결코 피할수 없는 운명이 아니였다.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신 김일성주석님을 받들어 한생을 깡그리 바칠것을 다짐하신 녀사께서 스스로, 기꺼이 걸머지신 운명이였다.

그래서 녀사께서는 그 모든 고생을 고통이 아니라 참된 수령의 전사만이 누릴수 있는 긍지스러운 특전으로, 인생의 다시없는 락으로 받아안으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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