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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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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12월 7일 [련재]

 

4. 변함없는 모습

 

탄생일에 대하여(2)

 

몇해전 나는 내가 그토록 존경하며 우러르는 김정숙녀사의 탄생일을 계기로 조국을 방문했었다.

나의 뜨거운 마음과 열렬한 경모심이 그대로 어린 붉은 꽃송이를 녀사에게 드리고싶어서였다.

12월은 내가 살고있는 우쑤리스크와 마찬가지로 조국에서도 역시 몹시 추운 달이다.

그러나 내가 찾은 조국의 그 12월은 차겁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속깊이에서 세차게 굽이치고있는 녀사에 대한 조국인민들의 뜨거운 마음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것마다에 한껏 어려있어 내 마음을 더욱 달아오르게 하였기때문이였다.

녀사의 탄생일인 12월 24일이 밝아오자 거리마다는 명절일색으로 단장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건한 마음들이 짙게 어려있었다.

나는 벌써 몇번째나 찾아오는 곳이지만 오를 때마다 더욱 숭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혁명렬사릉에 올라 숭고한 경의가 담겨있는 붉은 꽃송이를 녀사의 반신상앞에 삼가 드리였다.

녀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물결은 끝없이 흘렀다.

항일혁명투사들과 조선인민군 장령, 군관, 군인들, 만경대혁명학원의 원아들, 늙은이, 젊은이, 조선에 주재하고있는 무관단, 외교사절들, 류학생들…

끝없이 흘러드는 인파를 보니 녀사께서는 비록 오래전에 서거하셨으나 조국인민들의 심장속에, 세계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생하신다는 생각이 다시금 나의 가슴을 쳤다.

그날 오후에 나는 청년들의 경축야회에 참가하였고 저녁에는 4.25문화회관에서 조선인민군협주단이 준비한 음악무용종합공연도 관람하였다.

숙소에 돌아왔으나 나의 마음은 진정할수 없었다.

녀사께서 생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탄생일을 쇠신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들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태여난 날을 가지고있으며 또 그날을 크든작든 의의깊게 보내고싶어하는것은 공통된 심리이다.

하지만 녀사께서는…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시였다.

《김정숙은 해마다 잊지 않고 소박하게나마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지만 나는 가정을 이룬 후 1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도 그에게 생일상조차 차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생일에 대해서는 말조차 번지지 못하게 하는것이 김정숙의 성품이였습니다.》

주석님의 탄생일, 동지들의 생일은 언제나 잊지 않고계셨다가 꼭꼭 성의있게 차리시였으나 자신의 탄생일은 아예 없으신듯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으신 녀사.

나는 아래에 녀사께서 한생 맞고보내신 탄생일과 관련한 이야기가운데서 일부를 적으려 한다.

녀사께서 어리신 나이에 고역을 치르시던 연자방아간은 리춘팔이라는 지주의 집마당 한쪽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말이 방아간이지 벽이 다 떨어져 찬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한심한 곳이였다.

녀사께서는 이러한 곳에서 토스레옷 한벌에 해진 짚신을 신으시고 온 겨울 연자방아를 돌리시였는데 열세번째 생신날인 1930년 12월 24일의 그날에도 여기에서 고역을 치르시였다.

전날 녀사의 어머님께서 지주를 찾아가 래일이 우리 정숙이 생일인데 하루만이라도 쉬게 해달라고 사정하였지만 지주는 빚진 놈의 신세에 생일은 무슨 생일인가고 하면서 절대로 안된다고 딱 잡아뗐다고 한다.

어쩌는수없이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생일날도 고역에 시달릴 따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것 같아 더운밥이라도 한끼 먹이시려고 어머님께서는 다음날 연자방아간을 찾아가시였다.

추위가 여간 심하지 않은 때였지만 녀사께서는 연자방아를 쉼없이, 힘겹게 돌리고계셨다.

얼어서 퍼렇게 된 얼굴과 손, 부르트고 터갈라져 피가 내밴 입술…

어머님과 어린 동생이 대신 연자방아를 돌리며 잠시라도 쉬게 하려고 하자 녀사께서는 굳이 만류하시였다.

무엇때문에 어머님까지 이 집 연자방아를 돌리겠는가고, 어머님과 기송이가 이 집 쌀 한말 더 찧어준다고 우리 집 처지와 내 처지가 달라지겠는가고, 그저 가슴만 더 아플뿐이라고 하시며.

녀사께서는 이날도 입술을 옥물고 솟구치는 눈물을 애써 참으시며 하루종일 연자방아를 돌리시였다.

1945년 12월 24일, 이날은 녀사께서 해방된 조국땅에서 처음으로 맞으시는 생신날이였다.

그러나 녀사께서는 그때 생신날을 평양으로 향하는 유개화차안에서 맞으시였다.

그날 아침 남먼저 일어나시여 물도 길어오고 청소도 하시는 녀사를 보고 한 녀투사가 달려나와 왜 생신날에까지 이러시는가, 어렸을 때 자기 부모들은 생일날 일을 하면 일생동안 일밖에 차례지는것이 없다고 했다고 하면서 아예 일손을 잡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지난날에는 하도 고역에 시달리다보니 우리 부모님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야 해방된 조국땅에 로동이 기쁨이고 행복인 그런 사회를 건설할 사람들이 아닌가고 하시며 자신께서는 손에 총을 잡고 일제와 싸우면서도 어느 하루 작식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탓인지 물을 긷고 불을 때고 밥짓는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밥맛도 나지 않는다고 흔연히 말씀하시였다.

그날 함께 렬차를 타고있던 항일투사들이 성의를 다했으나 그때의 형편에서 겨우 반찬 몇가지를 갖춘 소박한 음식상을 차려드릴수밖에 없었다.

녀사께서는 생신날 떡 한끼도 대접 못한다고 안타까와하는 그들에게 자신은 오히려 그게 더 마음 편하고 좋다고, 앞으로 인민들이 잘살게 되였을 때 우리도 생일과 명절을 잘 쇠여보자고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녀사의 첫 탄생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 다음해의 탄생일은 또 어떻게 흘러갔던가.

1946년 12월 23일이였다.

저녁식사를 마치신 주석님께서는 녀사와 그리고 댁에서 함께 생활하고있던 친척녀성이 있는 자리에서 래일은 정숙동무생일인데 뭘 좀 준비 안하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밝게 웃으시며 《장군님 생신날도 못쇠게 하시는데 제 생일을 어떻게 쇠겠습니까.》라고 대답올리시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신의 탄생일을 쇠는것을 극히 만류하시던 주석님이시였던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친척녀성은 자기를 바라보시는 주석님께 무엇이라 말씀올리면 좋을지 몰라했다.

사실 생일날에는 본인이 아니라 옆에서 상을 차려주는것이 도리인것이다.

그래서 며칠전부터 그는 은근히 마음을 쓰며 음식감들을 마련하려고 시장에도 슬그머니 다녀왔었다.

그런데 이런 눈치를 알아차리신 녀사께서는 엄한 음성으로 생각 좀 해보라고, 장군님께서 저렇게 힘들게 일하시는데 우리가 헛딴 일에 정신을 쓰면 되겠는가고, 우린 어떻게 하면 장군님을 더 잘 모시겠는가 이 한가지 생각만 하자고 준절히 타이르시였다.

그렇게 되여 다음날 아침 보통날과 다름없는 소박한 식탁앞에서 녀사께서는 주석님의 축하를 받으시는것으로 해방된 조국에서의 두번째 탄생일도 맞으시였다.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어느해의 탄생일이였던지 녀사의 댁을 찾아온 녀투사들은 소박하게나마 상을 차려드린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한 녀투사는 내도산에서 맞던 녀사의 탄생일에 대하여 추억했다.

…1935년 12월 24일 아침, 여느때없이 모든 유격대원들에게 보리밥이, 자신께는 특별히 당콩밥이 차례지자 곧 사연을 아시게 된 녀사께서는 작식대원이였던 그 녀투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식량사정이 곤난한 때 제 생일을 쇠주겠다고 모든 대원들에게 다 밥을 지어주었으니 얼마나 랑비가 많았는가. 나는 혁명이 승리하는 날까지 생일을 잊겠다. 혁명이 승리하기 전에 다시 또 오늘처럼 생일을 쇠주면 아예 음식을 안 먹겠다. …

이렇게 회상하며 녀투사는 녀사께 이제는 나라도 찾았는데 오늘은 이 닭알이라도 마음놓고 들라고 권해드리였다.

녀사께서는 용케도 그때 일을 잊지 않았다고, 정 소원이 그렇다면 진수성찬으로 여기고 어디 한번 실컷 먹어보자고 하시며 모두에게 닭알을 쥐여주시고 자신도 한알 집어드시였다.

그러시다가 어쩐지 오늘은 산에서 싸울 때 생각이 더 난다고,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씹으며 함께 싸우다 쓰러진 동지들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목이 메여 말씀하시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새기면 새길수록 녀사의 탄생일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가슴을 아프게만 하였다.

모든 락을 미루고 미루시며 한해에 하루뿐인 탄생일에조차 마음편히 좋은 음식을 들어보지 못하신 녀사.

이것을 두고 주석님께서는 늘 몹시도 가슴아파하시였다.

그런데 례외적으로 주석님께서 몹시도 기쁜 마음으로 보내신 그런 12월 24일도 있었다고 한다.

1983년 12월 24일, 지방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던 주석님께서는 그날 아침 숙소의 식당옆에 대기하고있던 일군들을 보시자 눈굽이 뜨거워지시였다.

《감사합니다.

오늘이 김정숙동무의 생일이라고 이렇게 쉬지들 않고 나왔구만.》

주석님께서는 일군들의 심정을 헤아려주시며 그들모두와 주방의 료리사들까지도 모두 식탁으로 이끄시였다.

그날 저녁 주석님께서는 정원을 거니시면서 오늘 하루를 아주 유쾌하게 보냈다고, 김정숙동무의 생일을 처음으로 이렇게 크게 쇠여보았다고 하시며 지나온 나날들에 겪으신 만단사연을 더듬으시였다.

고즈넉한 정원의 밤공기를 흔들며 깊은 감회에 젖은 주석님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정말 김정숙동무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을 지니고 조국의 광복과 건국위업에 무한히 헌신하였으며 뜨거운 인간애와 강의한 혁명정신, 고매한 인민적풍모를 지닌 녀성혁명가의 전형입니다.

김정숙동무는 나를 위해서뿐만아니라 동지들을 위하여 한생을 다 바친 참다운 혁명가입니다.》

하지만 녀사의 탄생일을 두고 주석님의 가슴속에 맺혀있던 한생의 유한이 그날에 다 풀린것은 아니였다.

그때로부터 8년후인 1991년 12월 25일, 주석님께서는 어느한 중요한 대회에 참석하시여 먼저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19차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을 전달하시였다. 그것은 전날인 12월 24일에 진행된 전원회의에서 전체 조선인민군 군인들과 인민들의 일치한 념원과 의사에 따라 위대하신 김정일장군님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모시였다는 감격적인 소식이였다.

숨소리마저 죽이고있던 대회참가자들은 대회장이 떠나갈듯 열광적인 환호를 올렸다.

당시 그 격동적인 사변에 접한 조국인민들의 가슴에 터질듯 차오른것은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또 한분의 위대한 장군을 혁명무력의 최고령도자로 모시게 되였다는 끝없는 긍지와 기쁨, 행복이였을것이다.

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하많은 날들중에서 굳이 녀사의 탄생일을 택하여 그런 거대한 사변을 이룩하신 주석님의 심중에로 초점이 모아진다.

김정일장군님께서 김일성주석님의 혁명위업을 훌륭히 이어가는 장군이 되시는것, 이것은 녀사께서 지니셨던 절절한 소망이였다.

주석님께서 장군님께 군직을 넘겨주신것은 녀사께서 바라시던 그 절절한 소망을 실현해주는 뜻깊은 사변이였다.

그 사변을 다른 날도 아닌 바로 12월 24일에 이루시는것으로써 주석님께서는 자신의 가슴속에 한생토록 쌓여지신 유한을 드디여 푸신것이 아니겠는가.

해마다 이날이 오면 천만군민모두가 한없는 그리움과 경모의 마음을 안고 천출명장 김정일장군님을 높이 받들어올리신 김정숙녀사께 다함없는 감사와 영생축원의 인사를 드리며 환희와 격정으로 성대히 기념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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