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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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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5월 14일 [소개]

 

서도민요의 명창들(1)

 

서도지방은 예로부터 류창하고 명랑하며 민족적정서가 풍만한 민요들이 많이 나온 지역으로서 그 창작과 보급발전에 기여한 민요가수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오랜 음악가들의 구술로 전해오는 서도민요명창들중에서 가장 앞선 세대에 놓이는 가수는 허득선이다.

조선봉건왕조말엽의 대표적인 서도명창으로 전해오는 허득선은 고종 (조선봉건왕조26대왕 1864년-1907년) 시대에 활동하면서 뛰여난 가창과 익살로 이름을 날린 재능있는 민요가수였다.

19세기 중엽에 평양의 경림동에서 태여난 그는 일찌기 아버지를 잃고 눈먼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앞 못 보는 어머니의 눈이 되고 손발을 대신해주기 위해 노력하였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어머니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우스개소리로 가정의 침울한 분위기를 일소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허득선은 노래를 부르는 가창법과 함께 재치있는 예술적형상력 그리고 익살과 해학, 즉흥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는 묘리를 터득하였고 그것으로 유명해졌던것이다.

당시 서도일대에서 소리군으로 자처해나서는 사람이 허득선을 모르고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하면 아예 서도가수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고들 한다.

허득선은 평양을 비롯한 서도일대의 여러 지역에서 가창활동을 활발히 벌리면서 이따금 서울에도 나가 서도소리를 퍼뜨렸는데 그가 부르는 서도민요의 구성진 선률가락들과 익살과 즉흥으로 엮어지는 특색있는 연기형상은 한때 서울장안의 한다하는 대가집들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근대시기 허득선의 음악활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가 서도지방의 잡가 및 선소리양식의 형성과 보급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한것이다.

허득선의 활동기를 전후하여 서도지방의 민요전문가수들속에서 널리 성행하였던 서도잡가형식에는 그의 창조적재능이 적지 않게 스며있다.

잡가란 17세기말~19세기 초엽에 급격히 높아지는 사람들의 사상정서적요구에 의하여 도시와 민간의 전문가수들속에서 창조발생하여 세대를 이어 널리 불리워진 노래들을 가리켜 부른 말이다.

허득선은 선행한 민요가수들에 의하여 창작보급되여온 서도잡가의 가사들과 곡조들을 19세기 중엽이후의 변천된 현실과 사람들의 미학정서적요구에 맞게 재창조하여 부르면서 후세대가수들에게도 널리 보급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오는 서도잡가에는 허득선에 의하여 보충된 가락들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허득선은 또한 선행한 사당패예술의 산물인 《사거리》와 같은 련쇄가요형식들을 서도지방민요의 고유한 음조와 창법에 맞게 계승발전시켜 후세에 전하는데 기여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엽에 서도지방의 소리군들의 기본연주종목으로 되였던 《서도선소리》(놀량사거리)는 그에 의하여 보다 류창하고 락천적인 경쾌한 음악으로 창조완성되여 후세의 소리군들에게 전승되였다고 한다.

천한 신분과 불행한 가정에서 나서 자랐으나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뛰여난 가창과 웃음과 익살로 봉건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인민들의 가슴속에 시원한 웃음과 기쁨을 주었던 서도민요가수 허득선은 자기의 재능과 특기를 보여주는 많은 일화들을 남겨놓고 1900년대 초엽에 세상을 떠났다.

 

김일성종합대학 문학대학 민족고전학과 학생 김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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